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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르다 설교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8: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8:19~22


기독교 신앙은 거듭남에서 시작합니다.

요즘의 교회들은 교육을 중시하는데, 그러나 교육이 가지는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풀이하고,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하여 세밀하게 설명한다고 하여서 믿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것으로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세상의 지식으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관한 지식으로도 역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의 중심이었던 산헤드린회의의 멤버였습니다. 그는 나이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의 눈을 피하여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보십시오. 니고데모는 성경을 어려서부터 배웠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달리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따로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성경의 대부분을 암송하고, 해석하며, 설교할 수 있는 훌륭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식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천국에 가는 확신을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아는 것으로 천국 못 갑니다. 여기에는 성경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아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믿어야 천국에 갑니다.

그런데 사람이 거듭나지 못하면 절대로 성경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성경을 믿는가?

성경을 죽은 경전으로 보지 않고, 내 인생의 구체적 대답으로, 나의 인생에 가이드로, 나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삼고 있는가?

만약 성경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거듭남에 대하여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거듭났는가에 대하여는 모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영리를 듣고, 동의한 것이 거듭난 과정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영리가 부족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형식이 곧 거듭남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듭나기 이전과 거듭난 이후가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마태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세관 앞에 앉아있던 그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에 의하여 마태의 인생은 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태복음을 왕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마태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마태복음은 제자도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을 묘사하는 처음 이후에 계속해서 부르심과 제자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대미(大尾)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장엄한 제자도의 명령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태의 서술을 통하여 그가 왜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세관에 앉아 있었던 마태가 왜 직업과 가족을 버리고 떠돌이 선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왕이셨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 거절할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지고 다가왔습니다. 그는 그래서 예수님을 따랐고, 그 결과 그의 인생은 그가 생각도 못했던 완전히 다른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역사 속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모든 사람들도 한결같이 간증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알던 시절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의 인생은 변했다.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었다. 예전에 즐기던 모든 일이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했고, 예전과는 다른 즐거움들이 내 영혼과 마음을 가득 채웠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이 경험이 있어야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다른 나라의 말처럼 들립니까?

아멘으로 동의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계산과 반론의 생각들이 오히려 마음을 혼돈스럽게 합니까?

설교를 아무나 알아듣는다면 그것은 영적이 설교가 아닙니다.

설교는 육신의 말이 아니라 영혼의 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들을 수 있는 귀가 따로 있습니다. 듣고 순종하는 마음도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심하고, 노력하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의 차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셔서,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나, 거듭난 나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말씀대로 살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도 역시 제자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먼저 19절에는 서기관이 나옵니다. 서기관은 성경의 필사와 설교를 맡았던 직분의 사람입니다. 당연히 유대교의 종교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지적 차원에서 머물렀던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신앙이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늘의 우리 보다 열 배는 용감했습니다. 서기관이었던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의 종교적 기득권, 보장된 생활, 그의 명예를 모두 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시면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방향이 같으니 잠시 동행이 되자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지 자기도 따라 가겠다고 말합니다.

오늘 이런 고백으로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축복은 좋사오나, 시련은 싫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부자가 되는 것은 원하지만,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면 따를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성공은 받겠지만, 실패는 사양하겠다고 말하지는 않습니까?

이게 다 거듭나지 못한 육신의 한계입니다.

이런 신앙은 결코 예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 서기관이 따르게 될 길이 결코 평탄하지 않을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마치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예고하신 것처럼, 젊어서는 스스로 허리띠를 하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해주는 허리띠를 하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다니게 될 것이라는 예고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여우 보다, 공중의 새 보다 더 궁핍할 수 있습니다. 더 결핍된 환경에 놓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인자, 곧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머리 둘 곳 없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거기 계실 때에, 우리도 거기 있기로 작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제자도의 따름인 것입니다.

 

21절에 보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가 하나 예수님께 나와 청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잠시 가서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 다시 예수님을 따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로 단호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식 노릇, 가족으로서의 의무, 인간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꿋꿋하게 주님만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제자도의 따름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도 믿고,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 천국에도 갈 수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님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이미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재림을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그분의 영은 성령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성경의 말씀으로, 이 설교를 통해 우리 곁에 임재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을 만나고도 그분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이런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여러분이 말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나는 머리 둘 곳 조차 없단다. 그래도 괜찮겠니?” 물으십니다.

여러분이 표정을 바꾸면서 말합니다. “정말이예요?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야 하겠어요.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런 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

또는 이런 것입니다.

, 예수님. 이번 주일에는 주일을 지키지 못하겠습니다. 친구가 돌잔치를 하거든요.”

그거 유감이구나. 하지만 네가 나의 제자라는 것을 그 친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네가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그래야 그 친구도 나를 만날 기회가 있지 않겠니?”

글쎄요저는 그런 식으로 꽉 막힌 사람이 되기는 싫은데요. 예수님도 중요하지만, 친구관계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신앙생활 하는 편이 아닌가요?”

“…”

 

이렇게 하면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컵을 비우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욕심과 야망을 버리고, 내 뜻을 비워야만 비로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는 결코 예수님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한다면, 그는 가장 귀한 예수님을 얻고 또한 그가 포기한 것들을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지금 예수님을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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